donkeymusic 2012. 5. 30. 11:41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3)."

우리 나라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공공 에티켓들 중에는 버스나 전철에서 음악을 크게 듣거나 전화 통화나

대화를 크게 해서 불쾌감을 주는 것인데(내가 이런 것에 좀 민감하다...) 정작 소음을 내고 있는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 소리가 음악이요 꼭 필요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소리들이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음이 될까?

소음은 단순히 크게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다. 소음은 작아도 거슬리는 소리이며,

원치 않는데 들려오는 소리인 것이다.

음악은 소리를 다듬고 정리하고 걸러내고 숙성시켜서 나온 결과다.

악기나 목소리로 음계나 화성을 연주한다고 다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생각 중 하나는 음악은 아름답고 듣기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아름답고 듣기 좋다고 여기는 음악의 기준이 다르다.

누구에게는 시끄럽고 거슬리는 음악이 다른 누구에게는 감동적인 소리가 될 수 있다.

새 소리를 미국에서는 ‘노래’로 표현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대부분 새가 ‘운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같은 소리도 누군가에게는 음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아름답고 듣기 좋은 것이 되기 위한 일반적인 기준들이 있다.

첫째, 익숙함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자나 음악을 듣는 자 모두가 그 음악에 익숙하지 않으면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없다.

가요계에서 노래 잘 하기로 소문났던 가수들 중 몇 명이 과거에 CCM 앨범을 낸 적이 있었다.

기대하는 마음에 들어본 순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그 가수들이 노래는 잘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담은 CCM의 가사와 거룩한 표현력에는 몰입되지 못했기에 아주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음악가가 아무리 뛰어나게 연주해도 듣는 자가 그 음악에 익숙하지 못하면 청중에게는 소음처럼 들릴 수도 있다.

과거 나도 매우 국한된 장르의 음악만을 들었다. 락은 시끄럽고, 재즈는 어렵고, 클래식은 지루했고,

가요나 팝은 거슬렸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장르에 거부감이 없게 되었다. 그만큼 내가 여러 장르 음악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익숙함이 있으면 소음을 아름답게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거슬리게 느끼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어떤 미국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전철이 허름한 아파트 건물 아주 가까이 지나가서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소음이 심했는데, 그 방에 처음 묵게 된 주인공은 전철 소음으로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정작 그 방 주인은 아무런 지장없이 잠을 잘 잤다. 그 주인은 소음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이처럼 익숙함은 때로는 나쁜 것에도 적용된다.

우린 어쩌면 완성도가 떨어지는 교회 음악과 어설픈 크리스천 음악에 길들여져서 더 이상 뛰어날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 두 번째 요소가 필요하다.

둘째, 탁월함이다.

실수와 미흡함과 연습부족과 개발이 덜 된 재능으로 연주되는 음악은 소음이나 마찬가지다.

돈과 명예와 인기를 추구해야 하는 연예계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탁월함을 추구하며 객관적으로 크리스천

음악계보다 음악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서 우리들이 교회에서 듣고 연주하는 음악들, 또 크리스천 음반들을 들어보면 아름답고 듣기 좋지

못한 실수와 부족함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하나님께서는 음악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지 우리의

퍼포먼스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스스로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할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다.

진정 음악 실력이나 콘서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린 뭐하러 악기와 마이크를 들고 조명을 받으며 앞에 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부족함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이 없는 것은 불충성한 것이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은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되는 것이다.

부족한 예배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 탁월한 예배는 얼마나 더 기쁘게 받아주시겠는가!

때론 아이들이나 장애인들의 예배가 음악적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육체의 제약으로 인해 더 이상 잘 할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분명 지금보다 더 잘 할수

있는데 핑계를 대고 나태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CCM과 예배음악이 과거 80~90년대에 비해 탁월하지 않은가?

아니다. 기술적으로는 매우 탁월해졌다.

마이크, 악기, 장비들도 좋아지고 디지털 녹음으로 아주 깨끗한 음질을 자랑한다. 음악을 잘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무리 작은 교회에도 건반이나 기타는 물론이고 드럼이나 일렉 기타 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있을

정도로 연주자들이 많아졌고, 목소리들로 고음역대도 잘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음질도 안 좋고 박자도 절고 음정도 불안하고 자켓도 촌스러웠던 과거 시대의 음반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분명 다음 세 번째 이유일 것이다.

셋째, 진정성 있는 마음이다.

가식적이고 기계적인 음악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름답고 듣기 좋은 음악이라는 것은 결국 감동을 주는 음악이란 뜻이다.

감동을 주고 받는 것은 사랑과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가 부르는 노래에 모든 부모는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마음을 담아 불러주는 노래에 어찌 감동하지 않으랴!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아무리 내게 일방적으로 이벤트성 세레나데를 불러준다고 해도 그것은 감동적인 음악이 아니라 선동적인 소음일 뿐이다.

맨 위에서 인용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듣기 싫은 소음과 같이 여긴 음악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연주되는

예배 음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 소음 같은 음악을 당장 그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한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익숙하게 준비해서 가장 최고와 최선의 탁월함으로 드려지는 음악만이 그분을

감동시킬 수 있다.

성경 어디에도 ‘마음만 있으면 된다’라고 하신 적이 없다. 분명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왜 익숙함과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데 왜 그분께 더 아름답고 좋은

음악을 드리려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