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예배와 생계(2) - 박 동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광야에서 금식을 마치신 예수께 시험하는 자 마귀가 던진 첫 번째 시험은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귀가 금식 중간에 음식을 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40일 금식 기간을 온전히 마치신 예수께 ‘이제 금식도 잘 마쳤으니 당당하게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접근한 것이다.
마귀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광야에서 금식을 막 마쳐서 매우 굶주리신 예수께 지금 당장 음식을 먹으라고 유혹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험인 이유는 무엇일까? 금식 후 음식을 먹는 것이 죄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는 이적으로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이기에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대적 마귀는 먹고 사는 문제에 항상 영적인 것을 결부시켜서 우릴 시험에 빠지게 하려 하고 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생계 문제는 육적인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계에 충실한 것은 자신의 영적 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체에 관련된 모든 것은 그 근원적으로 영적인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육체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신 이후 우리 육체는 영혼과 결합되어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가 육체로 행한 모든 일이 영혼에게 영향을 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기록한 것이다.
우리의 생계문제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보다 우리 원수 마귀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우리 생계를 조여오고 있다. 마귀가 처음에는 예수께 먹는 문제로 접근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 예배하라며 그 영적인 본색을 드러낸 것처럼, 이 세상 생계와 의식주 문제에 그 근원에는
모두 영적인 뿌리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생계를 어떤 마음으로 해결하며 대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생계는 신앙과는 별개니 무슨 방법이든 간에 생계만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의 생각은 위험하다.
나는 여전히 생계 문제로 마음이나 몸이 힘들 때가 있지만, 전과 같이 어떻게든 일단 먹고는 살아야하지 않겠냐
식의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넉넉히 먹고 사는 사는 것이 나의 예배와 사역에
치명적인타격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늘 깨어 있으려 하고 조심하려고 하고 있다.
예배와 사역을 위해서는 차라리 나의생계에 손해를 보는 쪽을 택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보니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역자인 것을 증명할 수 없어 답답한 때도 있었다.
당장 임박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의 음식이요영의 생계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먹는 생계의 떡은 허무한 것임을 아셨다.
생계의 떡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신것이 그분의 예배였으며,
그분은 마귀의 모든 시험을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라는 말로 이겨내셨다.
마귀는 이처럼 전혀 예배나 사역과 상관없어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생계, 관혼상제, 애국, 가족관계와 같이 건전해 보이며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들 속에 영적인 유혹을 섞어서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제대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의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온전한 예배를 위해 아브라함처럼 때로는 자기 독자도 묶어서 희생 제단에 올려야 하고,
예레미야처럼 자기 조국을 비판하는 말을 해서 매국노로 몰리기도 해야 한다.
욥처럼 하나님을 끝까지 찬양하다가아내를 떠나보내야 하기도 하고,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춤추다가 아내의 비웃음을 당하기도 해야 한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학업이나 생계로 인해 신앙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서로 언급하지 않고 봐주고
배려하는분위기가 굳어져 있다.
생계가 예배보다 우선인 자는 이미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자이며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의
생계를 주관하시고 계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자는 결코 만나와 메추라기를 맛볼 수도 없고,
오병이어를 먹을 수도 없다.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을 먹을 수도 없으며,
물에서 변한 포도주나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생수를 마실 기회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생계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온전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